지보농협

내고향지보

내고향지보

지명유래

지명유래

소화리(所華里)

본디 龍宮縣 內下面 지역인데 1914년 行政區域 廢合으로 所洞, 白谷, 東幕, 外芳華, 德峴을 倂合하여 所洞과 外芳華의 이름을 아울러 所華里라고 이름 붙였다.

  • 밭들, 전평(田坪), 외방화(外芳華)

    1동막고개와 가막수리의 중간지점인 남향 마을로서 만화리 芳華 바깥쪽 밭이 많은 들의 뜻으로 田坪 또는 外芳華하며, 만화리 한골에 살던 公州李氏 일부가 200여년 전 농토따라 세거한 후 지금은 50여가구 중 公州李氏 외에도 咸寧金氏도 산다.

  • 동막고개(東幕)

    30여 가구의 南陽洪氏 집성촌이다. 옛날 주막거리에서 술을 팔던 具老婆가 양지 바른 이곳에 술청을 차리니 술맛이 하도 좋아서 동쪽 주막이 있는 고개란 뜻으로 동막고개가 되었다고 하며, 이 고개마루에서 빗방울이 南으로 떨어지면 洛東江으로, 북쪽에 떨어지면 乃城川으로 흘러서 三江에 가서야 상봉한다.

  • 주막거리, 수동(壽洞)

    삼밭나드리(麻田)에서 서울나들이(京津)로 가는 중간지점이다. 예로부터 행인이 끊이지 않아 행인들이 쉬어 가게 하기 위한 주막이 있었다고 하여 주막거리다. 현재는 면사무소와 초등학교와 지서가 있어 知保面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이곳 물맛이 좋고 술맛도 좋아서 피로가 쉬 풀리므로 오래 살수 있다는 뜻으로 壽洞이라 불린다.

  • 배골(舟室, 舟谷, 所洞, 素洞)

    예전 龍宮鄕案에 英陽南氏條 밑에 舟室로 표기되어 있으며, 聾汕 南相鎭의 舟室八景序에 마을이 舟室로 이름하니 무엇으로 그 實을 알 것인가? 그 지형이 幽燧하여 南으로 長江이 둘러 있고 北으로는 높은 山이 팔장을 끼고 그 가운데 있는 마을을 감싸는 듯하여, 흡사 넓고 푸른 물가에 바람으로 노를 삼고 물결로 돛대 삼는 듯하니, 예전 사람이 이런 것으로 이름짓지 않았겠는가 라고 했다. 이곳은 英陽南氏 世居地이다. 李朝 仁祖 때 南(1607∼1665)이 본시 安東郡 山邑 新安에 살다가 丙子胡亂(1636년)의 恥辱을 보고 과거 보는 일을 廢하고 이곳 國士峰 아래 草堂을 짓고 採薇歌를 지어서 벽에다 부쳤는데 이 草堂의 이름은 丙丁舍라 하였다. 舟室(배골)이 白谷으로 素洞으로 變하였음은 배 백 휠소(素)라 하여 모두 白으로 집약이 됐으며, 所洞은 素의 誤記인 듯하며, 배(梨)를 연상하였음은 飛躍이다. 厓翁을 세상 사람은 崇禎處士라고 불렀다. 마을 南쪽 市場으로 뻗은 등을 뱃등이라고도 한다.

  • 새터(新基)

    羅浮山 남쪽 아래 있는 아담하고 양지 바른 촌락이다. 戶數는 불과 20호의 작은 마을이나 公州李氏의 世居地이다. 宣祖 때 李敬(1568∼ ? ) 字는 國奉이요, 號를 羅巖, 官은 副護軍이고, 八代祖 沙峰 明德은 諡 恭肅이니 朝鮮開國名臣이요, 五代祖는 畛이니 臨陂縣令으로 端宗 遜位에 이어 群良이 就戮함을 보고 棄官 남하하여 榮川에 정착하였는데, 有子 五人으로 끝에 아들 末孫은 先入 芳華하고, 四男 從孫의 玄孫 則 公이 이곳에 비로소 入鄕하여 새로 基地를 잡았으므로 샛터 또는 新基라 하였다. 壬亂當時는 公의 나이 25세이니 그 뒤가 아닌가 싶다. 公은 羅浮山 아래 산다 하여 羅巖으로 號를 삼고 여기에 몇 간 집을 지어 羅巖亭이라 하였다.

  • 덧재, 덕현(德峴), 가현(加峴)

    안백골 남서쪽 덧재고개 밖에 위치한 마을이며 각성촌이다. 동쪽으로 재궁산이 높이 솟았고, 南으로는 洛東江이 흘러 명당이라고 하며, 덧재고개 밖에 새로 생긴 마을 터가 흡사 덧붙여진 고개마루처럼 여겨지므로 加峴이라고도 한다.

  • 장터, 백골(白谷) 시장(市場)

    1934년 홍수로 구마전에 있던 장터가 물에 떠내려 가자 거기 살던 사람들이 옮겨 와서 마을이 형성된 행정중심지로 所華里와 麻田里로 나뉘어 있으나 한 마을이다. 안백골 南東쪽이다.

마전리(麻田里)

본래 龍宮縣 內下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계리, 원학리와 병합하여 麻田里라 했다.

  • 석계동(石溪洞), 시끼동, 음지시끼동

    壬亂後 延安車氏의 石隱 車後連이 마을을 개척하여 그 후손이 살고 있으며, 北향 마을로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돌과 쇠가 있어서 쇳물이 늘 흐르므로 물고기가 깃들지 못한다고 한다. 뒷산에 절골이 있는데 지금도 기와 조각이 보인다.

  • 양지시끼동, 양지석계(陽地石溪)

    석계동 맞은 편에 있으며 석계동보다 늦게 개척되었고, 양지 바른 남향받이 이므로 양지석계라고 부르는 각성촌이고 마을 앞으로 石溪川이 흐른다.

  • 삼밭나드리, 구마전(舊麻田)

    洛東江변에 있는 교통의 요지로 구한 말까지는 강을 거슬러 올라 오는 소금배가 기착하든 나루터다. 오랜 옛날부터 장이 서고 상업의 중심지였으나, 1934년(甲戌年) 대홍수 때 떠내려가고 장터는 지금의 위치인 백골로 옮겨가서 麻田이라 하니, 이 곳은 저절로 舊麻田이 되고 높은 지대에만 마을이 남아서 농촌이 되었고 갯가에는 삼밭이 많았으며 또는 서울로 올라 가는 나루터였다고도 한다.

  • 월태이, 월탄(月灘)

    지금은 초등학교가 세워진 지역으로 지형이 朝集慕散形이므로 개인이 살기 드세다고 한다. 옛날부터 큰 인재가 날 곳이라 하였는데 1760년대에 神童이 태어나서 月灘童子라고 했으며 본명은 安必成이다. 열 살에 학문이 대성해서 많은 일화와 작품을 남겼으나, 그가 11세에 요절하자 아버지가 슬퍼하여 그 많은 遺稿를 불 태우고 지금은 몇 편만 남아 있다.

  • 워낙골, 원학(元鶴, 元學)

    40여가구의 延州玄氏 집성촌이다. 고려말 李朝 初에 沙月 玄玉亮이 高麗 世臣으로 나라가 망한 것을 통탄하고, 李太祖가 높은 벼슬로 부르는 대도 응하지 아니하고 지금의 虎鳴面 沙月에 정착하였고, 그 후손이 이곳으로 이주하여서 우리 고장에서는 가장 오래된 村落이기도 하다. 지세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며 학성정이 있었다 하여 由來된 마을이라고 한다.

  • 백골, 요성(腰城), 마전장터(麻田市場)

    1934년 甲戌年 큰장마로 洛東江 물이 범람하여 舊麻田에 있던 장터가 이곳으로 옮겨 와서 마을이 번창해지자 麻田장터라 했으며, 맞은 편이 所華里 백골이다.

  • 삼거리

    舊麻田의 한 마을이며 大邱 安東 醴泉으로 통하는 세 갈래 길목이다. 洛東江에 소금배가 오르 내릴 때는 麻田도방이라고 하여 小白山 이남의 화물 집산지였고, 지금은 洛東江에 知仁橋가 가설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 등말랭이, 비선거리

    舊麻田 복판 등성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 등말랭이는 安東과 尙州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慶尙道 觀察使 李裕寅을 비록하여 龍宮縣監, 柳敎睦 鄭寅亮 金相一등의 선정비가 있으므로 비선거리라기도 한다. 또 이곳에는 本道 觀察使 鄭基善의 善政碑가 있었는데 그 비석은 쇠로 되었으며, 돌비는 陰刻이지만 이 비는 양각으로 주조된 특이한 비다. 1934년 대홍수로 비각이 무너지면서 두 동강 난 것을 道庄里 鄭賜의 묘역 산기슭으로 옮겨 세웠다.

지보리(知保里)

본시 龍宮縣 內下面 지역이다. 사람이 살자면 예나 이제나 江과 무관할 수는 결코 없다. 낮은 산에 넓은 강 그리고 넓은 들 이것이 사람 사는 이상향이다. 수륙교통의 要衝地가 知保里이다. 따라서 村落이 형성된 지는 무척 오래이며 문헌을 더듬으면 高麗때까지 溯及할 수 있고, 한때 面行政의 中心地이기도 했다. 鶴駕山脈 太乙峰 靑龍嶝 안에 있는 이 마을은 옛날 朴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개척 당시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수령이 4백년이 넘었으며, 지금은 고령이나 아직도 일부는 청청한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산 밑에 있는 東來鄭氏 齋舍는 高麗時代의 知保庵이고 지금도 들보에는 중들이 메투리 날을 훌던 자국이 남아 있고 여러 가지 전설이 있으나, 이 知保庵으로 인하여 1914년 面이 통합될 때 知保面 知保里가 命名된 듯 하다. 이 지역은 新羅 때 佛敎가 전성할 때의 大岩寺라는 寺趾가 남아 있고, 佛陀山의 庵子 知保庵 부채등 氷庫嶝 石塔이 있고, 도처에 큼직한 高麗葬들이 널려 있다. 知保面이 발족되자 行政中心地로서 面所在地 憲兵分遣所 私設學堂이 있었으며, 앞 江변 마을에는 知保市場이 형성되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뒤 洛東江 수해로 인하여 舊麻田으로 市場이 移轉하였다.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했으므로 洛東江을 이용하여 安東 金海 間 소금배로 米穀을 무역해서 面民의 편리를 도모하였다. 洛東江 상류인 小白山 春陽 등지에서 松林을 採伐하여 洛東江水가 범람할 때 뗏목을 베어 하류로 띄워서 그 재목으로 가옥 건립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34년 甲戌年 大洪水 때는 安東의 유명한 映湖樓와 많은 가옥이 崩壞되어 난민들이 지붕을 타고 급류에 휘말려 표류하다가 마을 앞 섬 송림에 걸려서 사람 살리라는 비명을 듣고 이 마을 청년들은 결사적으로 배를 저어 40여명의 인명을 구출하였으므로 活人島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지역은 앞에는 飛鳳山이 높이 솟았고, 洛東江이 흐르는 山高水麗한 마을이다. 강변에 제방을 쌓아 홍수의 피해가 없으며, 全天候工事로 양수장을 설치하여 旱害가 없으며, 넓은 평야 기름진 沃土에 많은 생산을 가져와 어느 마을 보다도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교통편으로는 義城, 大邱, 醴泉으로 수차례씩 버스가 來往하고 있다. 知保里는 3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큰마(大村)

    이 마을은 350년전 綾城具氏와 南原梁氏가 자리잡아 현재 60여 家가 있고, 수령이 높은 느티나무가 마을 앞에 서 있다. 1950년에는 長老敎 高神側 敎會가 서 있다.

  • 새마을(新村)

    100여 家가 사는 咸安趙氏 집성촌이다. 顯宗 때(1670년) 새로운 基地를 찾아 다니던 趙振道가 佛陀山 부처 등이 둘러 싸였고, 그 앞으로 洛東江이 흘러서 마을 터의 지세를 살피니 하늘의 金星처럼 생겼음으로 자손 번성을 가히 기약할 만 하다고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 샛마(上洛)

    大村과 新村 사이에 있고 1906년에 基督敎가 개척한 후 마을 이름을 上洛이라고 했다. 350년 전 南原梁氏가 택거했고, 그 후 安東金氏, 龍宮全氏등 여러 姓이 20家가 살고 있다. 교회를 통하여 사설학당이 있었고, 교육열이 강하여 많은 인재을 배출했다.

  • 햇마(火仁洞)

    東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서 옛날에 홰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햇마로 불렀다고 한다. 현재 淸州鄭氏 재실 한집이 살고 있다. 火仁은 이두문이다.

도장리(道庄里)

본래는 龍宮縣의 內下面으로 면내에서는 가장 면적이 작은 곳이라고 한다. 道京里와 益庄里에서 한 자씩 떼서 道庄里로 이름하였다. 이에 속한 촌락은 道京, 益庄, 九村, 새낙골, 배낙골, 도름터, 海坪등이고, 姓氏는 東萊鄭氏, 迎日鄭氏, 義城金氏, 金寧金氏 등이 각각 특성있는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일쟁이, 익장(益庄)

    益庄의 地名은 石文 鄭榮邦이 처음 기지를 잡은 것으로 안다. 石文集에는 中年에 여기에다가 집을 짓고 살면서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먼저 십리나 떨어진 浦內의 伯氏 梅塢公에게 보내고 그 다음에 公이 맛 보았다고 한다. 뒤에는 太乙山이라고도 하는 삼봉산이 있고, 거기에는 중턱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발가락 다섯 개의 큰 발자국이 있어 장수바위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 장수가 案山인 반달섬 앞 飛鳳山에까지 뛰어 올랐다고 한다. 여기에는 또 성황당이 있고 부채샘이 동리안에 있는데 아마도 부처님과 유관하나 보다. 萊城君 鄭期遠과 石門 鄭榮邦의 不遷位 祠堂이 있고 芝圃講堂이 있다. 益庄의 이름은 말장이의 원색 짙은 설화도 있지만 大學章句에 因其己知之理而益窮之에서 命名하였다 한다. 石門集에 益庄 33詠이 보인다. 萊城君 祠堂에는 族門이 있다.
    마을중앙의 대창맑에 자리한 속칭 鄭墓는 直提學 鄭賜의 묘소인데 손자대로부터 朝鮮朝에 12사람의 政丞이 나서 전국에 있는 八名山 중의 으뜸이라고들 한다. 公은 晋州牧使로 재임중 54세에 별세하였다. 이 墓所에 얽힌 성화는 이러하다.
    名山을 구하고자 喪主 鄭蘭孫 등 5형제는 당시 陰陽學에 밝기로 유명한 朴(失名)풍수를 앞세우고 배로 運柩를 하여 洛東江을 거슬러 오다가, 先塋이 있는 龍宮 땅에 이르러 명산이 있음직하여 배를 멈추고 묘터를 찾으니 한 발 앞서 누군가가 壙中을 하고 있었다. 낭패스러운 朴풍수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나 보자고 찾아 갔더니 그들은 마침 水滿壙中이라 묘쓰기를 단념하고 돌아 가려는 참이었다. 상주에게서 그 묘터를 얻은 朴풍수는 東西로 5리씩이나 떨어진 3곳에 우물을 파고 물고인 壙中에다가 왕겨를 넣으니 그 물과 겨는 3곳의 우물로 빠져 나가고 壙中은 굳어져 조강하여짐으로 여기에다가 墓를 썼다고 한다. 齊舍인 知保齊는 옛 寺刹인 知保庵이고 부근에 흩어져 있는 石塔材로 한 개의 塔을 조립하여 公의 宗宅 앞 논 가운데 세웠다. 이 묘의 후손 慶尙道觀察使 鄭基善의 鐵碑는 1934년 舊麻田 비선거리에서 옮겨 세웠다.

  • 디깅이, 도경(道京)

    安山 묏굼 등은 옛날에 安氏들이 살았던 자취이다. 그리고 佛敎적인 지명인 塔골이 마을 뒤에 있고 옹기를 굽던 도요지도 있으며, 天主敎徒들이 박해를 피하여 이 마을로 숨어 들어와 살면서 옹기짐을 지고 다니며 전도를 해서 醴泉郡 內에서는 가장먼저 天主敎가 발붙인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옛 선비들이 서울로 科擧 보러가는 길목이라고 道京이라 이름지었다는 설도 있다. 이 마을은 義城金氏에 道松堂이라는 號를 쓰던 金聲應이 개척하여 그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요즈음은 東萊鄭氏도 산다.

  • 구촌(九村)

    益庄에 살던 東來鄭氏의 한 갈래가 옮겨 와서 이룬 他姓이 못 산다는 同姓村落이다. 마을 뒷산에 있는 아홉 그루의 느티나무에 붙여 九槐菴이라고 自號한 선비 鄭貴복(?)의 후손들이 눌러 살면서 九村이라고 했으며, 마을의 지세가 거북이 흙탕에서 헤어 나오는 형국(金龜沒?刑)이라고 龜村이라고 쓰기도 한다.
    천년노송인 그 느티나무가 봄에 잎이 잘 피면 그 해 풍년이 들고, 또 여름에 가물다가도 이 나무가 울면 그 소리는 10리에 뻗히고 비가 내리며, 그 울음소리는 나무안에 있는 龍이 우는 소리라고 믿고 있다. 洞神木이기도 한 이 나무에 致誠하면 영험이 있다고 遠近에서 祈子, 祈福m 消災를 위해 모여 들었었다. 원래 마을 터는 安氏들이 잡았고 앞으로는 朴氏들이 들어와 살 것이라는(安鄭朴繼居之地) 예언 때문에 朴氏등을 경계하는 마을이다.

  • 새낙골(鳥飛洞, 鶴村)

    이 마을도 익장과 구촌처럼 東萊鄭氏만 사는 同姓村落이다. 地形이 새가 높이 나는 형국(鳥飛上天形)이므로 생겨진 마을 이름이고, 孝子竹溪 鄭大瑞의 後孫인 鎔九가 개척해서 당내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는 양지 바른 南향 마을이다. 鶴隱 鄭雲極이 서당을 열고 훈학하면서 마을 이름을 鶴村이라고 썼다.

  • 배낙골(梨湖)

    새낙골 西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두 마을이 이어졌지만, 배낙골이 먼저 개척된 곳이다. 그 옛날 이 마을을 개척한 이는 金寧金氏로서 이 고장의 東萊鄭氏와 結査한 인연으로 여기에 터를 잡은 金棟이다. 본시 마을 이름이 없던 곳인데 그 아들 代에 어떤 풍수가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가면서 이 골에 배나무를 심으면 지세가 배나무에 꽃이 피는(梨木開花形 一說에는 梨花落地形) 형국이 될 것이니, 배나무를 심고 마을 이름도 거기에 맞추어 배나무골이라고 부르면 좋겠다 하고 떠났다. 그 말에 따라 심었다는 청실배나무는 이 고장의 흉풍을 점치는 나무가 되어 지금도 싱싱하다.

  • 도름터, 해평동(道陰, 海坪洞)

    일반적으로 안마을을 도름터, 바깥 마을을 해평동이라고 하나 한자표기로는 주로 海坪洞이라고 쓴다. 옛 龍宮縣이지만 지금은 義城郡 新平面이 된 申上面에 살던 迎日鄭氏로 海菴 鄭德采라는 이가 안마을을 개척해서 지금까지 그 후손이 살고 있다. 마을 앞길이 응달져서 늦봄까지 얼음이 쌓이므로 道陰이라는 뜻으로 도리터도리티하다가 變音이 되어 도름터가 되었다고도 하며, 바깥 마을이 생기면서 海坪洞이라고 썼다.
    이 마을 앞의 산과 들의 이름이 두지머리 조개등(貝嶝) 황새등(鶴嶝) 들개등 바닷재(海峴)등 바다와 연관성 있는 지명을 아름답게 여겨 붙여진 이름이다.
    바깥 마을앞에 어룸샘이라는 식수샘이 있는데 益庄에 鄭墓를 쓸 때 팠다고 하며, 우물바닥에 그 쪽으로 뚫린 큰 굴이 있다. 과거 보러 갈 때 이 샘물을 마시고 가면 及第한다고 길손들이 모여 들었는데 명산 정기를 나누어 가지기 때문이다.

도화리(道化里)

본래 龍宮郡 申上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축동, 화량동, 삼송동, 도마동 일부를 병합하여 도마와 화량의 이름을 따라 道化라 했다.

  • 싸릿골, 축동(杻洞)

    사창 못뚝 밑에 있는 70여호의 각성촌이다. 300여년 전 三陟金氏, 慶州崔氏, 淸道金氏가 같은 해에 들어와 무성한 싸리나무를 베어 내고 개척했는데 지금도 三陟金氏 종가에는 싸리기둥이 남아 있다.

  • 창마, 사창(社倉)

    洛東江변에 위치하고 조선조에 이 마을의 道化里 190번지에는 龍宮縣의 환곡을 쌓아 두던 사창이 있었다. 마을 앞에 龍宮縣監 韓宗揆(숙종때, 1713년)의 永世不忘碑가 있다. 이 비석을 광복 후 마을 앞 개울의 돌다리로 사용했다가 마을에 재화가 끊이지 아니하므로 다시 제자리에 세우고 환경도 미화했다.

  • 삼송(三松)

    화량 서쪽에 있는 마을이고 병자호란 후에 梁同知가 개척했으며, 마을 앞에 세그루의 노송이 있어 당시에 길손들이 쉬어 가던 곳이므로 三松이며, 마을 뒷골 웃마시들은 수세가 좋아 살기 좋은 곳이다. 특히 이 마을의 개척자인 梁同知가 후손이 없으므로 동민들이 계를 모아 묘소를 수호하면서 매년 제사를 지내 주고 있다.

  • 도마티, 도마(道馬)

    지형이 칼도말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지어 졌다고 한다. 마을 앞 蓮花峰 딴등에서 군사들이 숙영하든 터가 남아 있다고 하니 아마도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 하랑골, 화랑골(化浪)

    싸리골 서쪽에 있는 安東金氏 집성촌이며 지금부터 약 200여년전에 이들 조상이 새로운 기지를 찾아 여기까지 오니 해가 저서 쉬어 가게 되었는데, 연못에 부용이 곱게 핀 꿈을 꾸고 여기에 터를 잡았다고 하며, 마을 앞 들판은 곡식이 잘된다고 화량(禾良)이라기도 한다는 마을이다.

  • 불미골, 불미고개, 야현(冶峴)

    지형이 불무처럼 생겼다 하여 불미골이란다. 三松에서 시고개(三峴)로 넘어 가는 길목에 있으며 길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은 후미진 곳에 있다.

신풍리(新豊里)

본래 龍宮郡 申上面의 지역으로서 新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리, 직동, 방학동, 구룡동, 대죽리 일부를 병합하여 新豊이라 했다.

  • 신풍(新豊)

    150 여가구의 坡平尹氏 집성촌이다. 마을이 너무 커서 위치에 따라 윗마을 아랫마을이라고 하며, 또 길 건너 있는 마을을 청미라고 부른다. 고려초에 태사 權幸이 이 근처에 분음막을 설치하고 한 대(大竹)라고 했으며, 그 뒤 朝鮮 초에 司直 李長俊이 報恩에서 娶鄕인 이 곳에 移居하였는데 그 처가는 安東權氏이다. 그 뒤에 李氏는 龍宮面 佳梧室로 移居하였지만, 뒤따라서 龍宮 武村에서 參議 尹琢이 이 곳에 移居하였다. 당시에는 李氏와 이웃해서 산 듯하다. 尹琢은 晩遯庵 尹師晳의 후손이다. 그 뒤에 지금의 大竹里와 분리하여 新豊이라 불렀는데 大竹里는 5리가 채 못되게 떨어져 있다.

  • 구룡동(九龍洞)

    40여가구의 安東金氏 집성촌이다. 김수준이 丙子胡亂에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 安東權氏등에 업혀서 외가인 이곳 松蘿洞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용모가 비범하고 골격이 준수하여 7일만에 말을 하고 다락에 올라 가므로 주위에서는 이 마을에 장수가 났다고 법석이었으나, 힘센 장수가 나면 역적으로 모함을 받아 멸문의 화를 입는다고 두려워 하여 이 집에서는 챗돌로 눌러서 17일만에 죽게 했다고 한다.
    이 때 마을 앞 重萊山에서 龍馬가 9일이나 슬피 울다가 사라졌고, 마을의 식수가 핏빛이 되었다. 때마침 시주 나온 중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가르침을 구했더니 이 우물은 장군수이므로 장수가 먹어야 하는데, 장수가 못 먹게 되니 우물도 그 일을 슬퍼하여 빛깔이 변했으니 식수로 쓸 수 없다고 하므로, 그 중에게 새로 살 터를 구해 달라고 해서 지금의 마을터를 잡아 주고 죽은 어린 장수와 龍馬의 넋을 달래기 위해 九龍洞이라고 마을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고 傳된다.
    풍수설로는 아홉 마리의 龍이 여의주를 다투는 (九龍爭珠) 명당이 있어서 九龍洞이라고 한다기도 한다.

  • 피앗골,직동(稷洞)

    高麗 末에 節臣 權가 이곳에 숨어서 절의를 지키며 뒷산인 松山에 올라 松都를 바라보며 옛 왕실의 안부를 걱정했다 하여 濂자를 念자로 고쳐 念松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을 피난골이라고 하던 것이 피앗골로 변했다고도 하며, 또 피가 많이 생겨서 잘 자란다고 해서 稷洞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 방앗골, 방학동(放鶴)

    신풍 南西쪽에 있는데 지형이 디딜방아처럼 생겨서 방앗골이며, 또 뒷산에 鶴이 서식하여 放鶴洞이라고도 한다는 南향받이 마을이다. 壬亂後에 尹이 개척하여 그 후손이 이어 살고 있는 坡平尹氏 집성촌이다.

  • 샛방앗골

    구룡동과 방앗골 사이에 있으므로 샛방앗골이며 방앗골에서 옮겨 온 坡平尹氏들이 살고 있는 30여 가구의 同姓村이다. 앞들이 넓고 기름져서 살기 좋은 南향 마을이다.

  • 절골, 사곡(寺谷), 절동(節洞)

    高麗 末 李朝 初에 이곳에 숨어 세상을 등지고 살던 權는 이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고 해서 節洞이라고 하고 후세에 節洞이 寺谷으로 변해졌으며, 후인들이 寺谷이라고 刻字한 주춧돌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竹林(權山海의) 순절하였음을 알리는 旋忠閣이 여기에 있다.

  • 황소말, 황소말기

    방앗골 북쪽에 있는 고개가 황소등과 같이 생겼다고 하기도 하고, 또 황새등처럼 생겼다고도 하는 황소등말냉이 아래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방앗골과 이어져 있으므로 한 마을처럼 보이지만 마을 이름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

  • 서당마, 서당동(書堂洞)

    新豊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新豊에 살고 있는 坡平尹氏를 중심으로 12門中이 朝鮮 中葉에 힘을 모아 후진을 양성하며, 학문을 강론할 목적으로 서당을 세웠던 곳에 생긴 마을인데 서당터는 남았으나 12門中이란 姓氏는 알 길이 없다.

  • 써놋골, 써닛골

    九龍洞 뒤쪽의 골짜기인 써닛골에 생긴 마을이며 지형이 무논에 쓰는 농기구인 써레처럼 생겼으므로 그 지형에 따라 지은 이름으로 앞들은 토질이 비옥하고 농사가 잘 되기로 손꼽힌다.

대죽리(大竹里)

본디 龍宮縣 申上面의 지역이다. 대나무가 무성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岩川里 일부를 병합하여 大竹里라고 했다.

  • 한대(大竹里)

    옛부터 우리나라의 十名地로 전해 오는 마을이다. 鳳逗嶺을 주봉으로 남쪽에 圓方山이 있고, 동쪽은 舟登浦山이 左靑龍을, 서쪽은 앞 남산이 右白虎를 이루고, 남쪽으로 洛東江이 흐르는 삼태기 형으로 된 正南向의 마을이다. 대나무가 무성하던 곳에 마을이 생겼다 하여 大竹里라고 하며 예부터 '한대'라고 부른다. 高麗 太祖 5년에 權太師'幸'가 이곳을 지나다가 농부를 위하여 움막을 지어 주고 分陰幕이라고 하였으니 新羅 때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大竹里 북쪽 鳳逗嶺(봉우재 또는 봉화재) 밑에 法井골이 있는데 新羅時代에 法井寺가 있었다고 하나 절터만 남아 있다(塔基가 있다). 鳳은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고 짝을 맛춘 이름이고 마을은 웃한대(上大竹) 아랫한대(下大竹)로 나누어 있었는데, 아랫한대는 坡平尹氏가 살고부터 新豊으로 개명하여 新豊里가 되었고, 웃한대는 마을이 커지면서 다시 東쪽 마을과 西쪽 마을로 나누어졌고, 옛날에 마을 사람들끼리 말싸움을 자주 하므로 이 마을 사람들이 舟登浦山을 개의 주둥이 같이 생겼다고 하며, 주둥이를 막으면 말싸움이 없어질 것으로 하여 주둥개山 中허리에 말무덤(言塚)을 만든 후부터는 말싸움이 없어지고 마을이 평화로와졌다는 전설이 있다.
    舟登浦山은 양설이 있는 바 그 옛날 수천년 전 洛東江물이 舟登浦山 옆으로 흘렸으므로 그 곳이 배를 메어 두던 나루터였다고 하여 舟登浦山이라는 말도 있고, 또 風水地理說로 山의 형국이 배와 같다 하여 舟자를 따서 주등개 산이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다. 大竹里에는 壬辰倭亂을 전후하여 密陽朴氏와 仁川蔡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으나(그 당시 여기 살던 春川朴氏는 退溪(李滉)의 外家이기도 하다), 壬亂後에 金寧金氏 金德恭이 入鄕한 후 지금 大竹里 서쪽 마을은 金寧金氏 4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고, 密陽朴氏, 仁川蔡氏, 晋州柳氏 등 여러 姓氏가 살고 있다.
    그리고 인맥으로 보면 朝鮮初 權竹林(山海)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 死六臣과 同殉했고 省吾堂(慶州人 李介立)이 태어난 곳이다.

암천리(岩川里)

본래 龍宮郡 申上面의 지역으로서 안에 너리바위가 있으므로 너리바우 또는 광암(廣岩) 암천(岩川)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동군 풍서면의 구담리 일부를 병합하여 岩川里라 했다.

  • 너리바우, 광암(廣岩), 암천(岩川)

    醴泉林氏가 많이 사는 마을이며 마을 앞 개울 바닥이 아주 넓은 바위로 뒤덮여 있는 곳에 생긴 마을이므로 너리바우라고 한다.

  • 갈피동, 갈포(葛浦)

    醴泉林氏 세거지이며 옛날 龍宮 醴泉 安東郡界의 마을이다. 너리바우 북서쪽에 있고, 1872년 갈대밭을 개척하여 마을을 개척했다 하여 갈피동 또는 갈포라 부른다고 한다.

  • 강정(江亭)

    洛東江변에 자리 잡은 너리바우 남동쪽 마을이며 江亭이란 亭子의 이름을 딴 것이며 安東郡 豊川面 九潭洞과 이어져 있다.

  • 장구매기, 부항(缶項)

    너리바우 남동쪽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缶項이라고 군지 등에 표기되어 온 고장이다. 뒷산이 國樂器인 장고의 허리처럼 생겼으므로 장구목재라고 부르며 그 앞의 南향받이 마을이다.

  • 재궁마, 재궁촌(梓宮村, 齋宮村)

    장구매기와 너리바우 중간 지점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權氏들 재사가 있어서 재궁마라고 한다고 하나 옛 군지에 梓宮村이라고 있으니 梓宮은 제왕의 棺을 뜻하는데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 돌구마, 들구마

    재궁마 東쪽 우루골 北쪽에 위치한 곳이며 마을 복판에 돌절구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마을 이름이며, 기계문명이 발달하기 전에 그 마을이 돌절구나 연자방아를 가지고 도정을 했다는 것은 큰 자랑거리였다.

어신리(漁薪里)

본래 龍宮郡 內上面의 지역인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율리(栗里), 신전리, 갈동리, 어소리, 신류리를 병합하여 어소와 신전의 이름을 따라 漁薪里라 했다.

  • 어지리, 어소(漁沼)

    朝鮮 世祖 때 金海金氏 金龍國이 개척하고 마을 앞 연못에서 고기를 낚으며 즐겼다는 곳이라고 마을 이름을 어지리 또는 漁沼라고 부른다. 지금은 그 연못이 개울바닥이 되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구전되는 민담이 있다. 아주 인심이 좋고 후덕한 平山申氏 부자가 대대로 이 마을에 살았는데, 원근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친속하게 이 집을 드나들며 마치 다정한 이웃처럼 지냈다. 가난한 사정을 듣기만 하고도 아무 말없이 도와 주었으므로 근방에서는 이 부자를 말없이 도와 주는 벙어리라는 뜻으로 申버벌네라고 했다. 이근처 사람들은 감기가 걸려 재채기를 할 때도 “申버벌네집으로 가거라” 라고 했다. 역신도 가난한 사람을 괴롭하지 말고 인심이 후덕한 申버벌벌네 집으로 가서 대접받고 가라는 뜻의 주문이라고 한다.

  • 갈동(葛洞)

    어지리 北西쪽에 있는 약40여 家의 安東金氏 집성촌이며, 壬亂전에 金希福이 이 마을을 개척할 때 산에는 칡덩굴이 많아 들어갈 수 없고, 들에는 갈숲이 우거져서 새로 터를 잡기가 어려웠으므로 그 어려움을 후손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葛洞이라 했다 하며 지금도 칡과 갈대가 많은 마을이다.

  • 다바우, 다암 (多岩)

    어지리 北西쪽에 있으며 마을 뒷산에는 큰 바위가 즐비하게 있고 개울에도 돌이 많이 있다. 돌 많고 바위가 많아서 다바우라는 마을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섯밭, 섶밭, 신전(薪田)

    다바우 南西쪽에 있는 마을로 다바우에 살던 沈氏가 이곳으로 이주하고, 이 마을이 다바우에서 西쪽이므로 서밭, 섯밭(西田)이라고 불렸다 하며, 또는 땔나무를 채취할 수 있던 지역이라는 뜻으로 薪田이라 했다고도 한다.

  • 까막수리, 까막술, 오산(烏山)

    이 마을 뒷산이 까마귀가 혈이고 앞산은 나지막한 언덕으로 송장혈이다. 뒷산의 소나무 위에 앉은 까마귀가 앞산의 죽은 산을 보고 시끄럽게 우는 곳이라 하여 까막수리 또는 까막술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옛날 어느 해 큰홍수에 사람이나 가축이 모두 휩쓸려 죽고 다만 까마귀떼 만이 마을터를 뒤덥고 슬피 울어서 까마귀가 슬피 운 곳이라는 뜻 이라기도 한다. 또 南쪽 선비들이 洛東江을 건너 서울나들이를 거쳐 과거 보러 가는 길목의 주막거리였는데, 이곳 주막에서 선비들이 쉬고 갈 때 주모들이 이들을 새선비라고 불렀다. 그래서 선비가 머물러 가는 곳이라고 풍류객 어느 선비가 新留라고 했다가도 한다. 또 공술 먹고 환대 받고 갈 수 있는 곳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는 까닭 없이 술값을 물게 되거나 금전상 손해를 보게 될 때 그 사람을 오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송평리(松坪里)

본래 龍宮郡 內上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송리 외평리 고슬리를 병합하여 松坪里라 했다.

  • 가마골, 오송(烏松)

    옛날에 숯가마가 있던 곳이라기도 하며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긴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가마골이라 불린다. 朴某가 개척한 터라 하나 지금은 龍宮全氏들이 살고 있다. 처음에 朴氏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앞들에 우물을 팠더니 밤마다 그 우물에서 龍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므로 그 우물을 메우고 또 딴 곳에 우물을 파도 역시 龍의 울음소리가 들려 오니, 朴氏들이 살터가 아니므로 龍이 노했다고 여긴 朴氏들이 떠나버리고, 그 뒤 淸州鄭氏들이 옮겨 와서 가마골이라고 마을이름을 삼았으며, 그 뒤로는 龍이 마을을 잘 지켜주어 부촌이 되었다고 傳한다.

  • 새동네, 신동(新洞)

    가마골 南東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가마골에서 약 1km 떨어진 도로변에 위치한 마을로서 들따라 농사짓기 편리한 곳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新洞이라 부른다.

  • 바깥들, 외평(外枰)

    朝鮮 初 順興安氏들이 터전을 잡을 때 앞들이 모두 밭이고 논이 없으므로 밭들(田坪)이라고 불렀던 마을이라고 하나, 壬亂후 빈터로 남았다가 산골의 馬山에서 1870년경 安東張氏들이 들어오면서 들이 넓고 교통이 편리한 산 밖으로 나왔다고 하여 바깥들 또는 外枰이라 불렀다는 것이며 50여호의 安東張氏 집성촌이다.

  • 거리실, 거리마

    外枰에 살던 張氏들이 外枰 바깥쪽을 다시 개척한 마을이므로 거리실이며, 東으로 매봉산이 높이 솟았고 들이 넓어 농사짓기나 교통상 매우 편리한 마을이다.

  • 고실고개, 고슬(鼓瑟)

    外枰 東쪽의 鼓瑟고개는 虎鳴面과의 面界에 위치한 마을이다. 東쪽으로 매봉이 있고, 南쪽으로는 飛鳳山이 수려하고 西쪽으로는 高麗末에 홍건적을 정벌한 金得培 장군의 군졸들이 주둔했다는 陳嶺山이 높이 솟았고, 北으로는 乃城川이 유유히 흘러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며, 지형 또한 彈琴形이므로 이 마을 사람들은 풍류를 즐겼다고 하며, 黃氏 高氏 李氏등 三姓이 주로 살고 있다. 醴泉邑誌에서는 고실고개를 古谷峴이라고 적었다.

수월리(首月里)

본래 龍宮郡 內上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수동리 서월리 내동 성촌을 병합하여 수동과 서월의 이름을 따서 首月里라 했다.

  • 수동(首洞)

    50여 家의 安東權氏 집성촌이다. 高麗 末의 安東權氏의 한 儒生이 정착하여 개척하였다 하며, 朝鮮朝 仁祖 때에 權台一이라는 이가 자기 이름을 따서 台一洞이라 불렀는데, 舊韓 末에 龍宮郡守가 이 지방을 初度 巡視次 와 보니 산세가 좋고 마을이 아담하여 가히 머리잡아 찾을 만한 마을이라 하여 머리골(首洞)이라 한 데서 마을 이름이 개칭되었다고 한다.

  • 안골, 내동(內洞)

    南으로 巍然한 陳嶺山이 솟아 있고 北으로는 도도히 흐르는 乃城川이 가로하고 있다. 이 山高水明한 사이에 깊숙이 위치한 아담한 마을이 內洞(안골)이다. 깊숙이 들어간 동리라 하여 內洞이며, 傳하는 말에 의하면 慶州崔氏의 入鄕祖인 竹潭 崔儀가 처음에 살았던 京畿道 高陽郡 壁蹄面 城石里 內洞이 그리워서 望鄕의 뜻으로 內洞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1450년경에 安東權氏 入鄕祖인 權漢生은 弱冠으로 咸昌縣令을 역임한 바 있는데 그렇고 보면 權氏가 먼저 개척한 듯하다. 그 때 심은 들매나무를 남정(枏亭)이라 부르고 洞神으로 삼고 지금까지 正月 15일이면 동신제를 지낸다.
    知保面 保護樹로 지정된 이 나무는 수령이 약 400년이다. 이 노목은 매우 靈驗이 있어서 洞民의 무사함을 기원함은 물론이고 祭壇에 밝히던 참기름 불종지를 가져다가 삼신을 빌면 어김없이 아들을 낳게 된다고도 했다.
    그래서 남몰래 불종지를 가지려 가다가 失火를 해서 1890년대에 이 나무가 불탔으나 天幸으로 그 翌年에 새싹이 동아서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이 근처 耕地를 갈다 보면 간혹 아주 오래된 기와 破片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예전에 이 곳에 寺刹이 있었을 법도 하다.
    동구에 옛날에는 유명한 藥水샘이 어쩌나 사람이 몰려드는지 가난한 洞民들은 숙식 제공에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이을 막기 위해서 개를 잡아서 피를 뿌렸더니 그 후부터 藥水는 말라 버렸다고 한다. 마을 앞 들 이름이 개긍지들인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나 후세의 사람들은 농사 짓는데도 우리 모두 긍지를 갖자 라고 풀이하고 있다.

  • 잿마, 서월, 성촌

    지금 20여家가 살고 있으며, 마을 南쪽 산인 진령산 줄기 중 가장 긴 산등성이에 東향으로 된 마을이며, 마을 뒷산이 진등산인데 강 건너서 보면 구렁이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이 마을에 살다가 구렁이 알이 깨어 나면 마을 사람들은 어디론가 멀리 떠나야 좋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옛날에 仁同張氏들이 마을을 처음 개척하여 집단으로 살면서 富得名을 하였더니 마을 옆 산에서 구렁이가 알에서 깨어나자 張氏는 차츰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朝鮮朝 中期에 海州崔氏가 閒余골에서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 뒷산에는 東學亂 때 관군과 대치하여 싸우던 옛터로 잿마라고 불리워진다고 한다.

  • 평짓마, 평지(平地)

    현재 20여家가 살고 있는데 300여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 운세가 평지와 같이 순탄하라고 기원하는 뜻에서 평지마라고 한다. 마을 앞에 巨木이 있어 여름이면 휴식처로 풍치가 아름다웠으나 지금은 나무뿌리만 남아 있다.

  • 오리골

    현재 20家 가량이 살고 있다. 잿마에 정착한 海州崔氏는 약 250년 전에 이곳을 개척하여 살림을 났다고 한다. 금가마귀가 잡신을 물리치고 동민을 평화롭게 보호한다고 烏字를 넣어서 지은 동명이라고 한다.

  • 진등

    오리골 北쪽 긴 등성 끝에 있는 독가촌이다. 20년 전만 해도 3집이 있었고현재는 한 집 밖에 없지만 마을 이름은 여전히 존재한다.

상월리(上月里)

본래 龍宮郡 內上面의 지역으로서 다릿골 위쪽이 되므로 웃다릿골, 상월곡, 상월곡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성조동과 용장을 병합하여 上月里라 하였다.

  • 성줏골, 성짓골, 성조동(盛鳥洞)

    90여 家의 慶州崔氏 마을이다. 이 마을은 崔氏 아닌 성은 못산다는 마을이라하여 원래 洪氏와 文氏가 개척했으나 崔氏가 들어 오자 멀리 떠나 버렸다고 한다. 그 까닭은 마을 뒷산을 새장말개라고 하는데 해질녘이면 잘 새들이 수없이 모여들어 새의 낙원을 이루니 山 아래 새(佳)가 곧 崔氏이며 崔氏가 살 낙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 새터, 용장골, 신기(新基), 용장(龍庄), 용정(龍井)

    성주골에서 慶州崔氏가 건너 와 살므로 새터라고 하나, 마을 뒤에 큰샘이 있는데 龍이 지나가다가 샘에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어 龍庄 또는 龍井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풍수설에 마을이 배形局이라 배바닥에 구멍을 뚫으면 吉兆가 아니라고 샘을 메우고 마을 이름을 龍井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마을 앞산이 龍처럼 생겼다고 龍庄이라고도 부른다는 마을이다.

만화리(晩華里)

龍宮縣 內上面의 지역인데 만촌, 구태, 방화를 병합하고 晩村과 芳華의 字를 모아서 晩華里라 하였다.

  • 한골, 방화(芳華), 대동(大洞)

    委鳳山 기슭에 東向으로 자리잡은 아담한 마을이 있으니 이것이 한골이다. 연령 500년을 자랑하는 이 마을은 芳華 大洞 한골로 불리웠다. 大洞은 한골로 통하지만 芳華는 公山世史에 기인된 것이다.
    동리 한 복판에 등성이가 하나 있어 취락이 양분되었으며, 두 동리의 통로를 「구렁목」이라 하였으니 이 말은 用水란 뜻이다. 수백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이 말의 뜻을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와서 洛東江 물이 이 구렁목을 잘라서 지나 갔으니 이제야 그 뜻을 알게 되었지만, 方山公의 易學이 아무리 밝다지만 500년 후인 오늘에야 정확하게 적중이 됐다 함은 다만 신기하기만 하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方山齊의 아버지 臨陂縣令 畛이 端宗이 遜位하고 群賢이 就戮탁함을 보았는데, 몸서리 나는 政變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하여 榮川에 정착하였고, 그 아들 方山齊 末孫이 이 곳에 기지를 잡고 隱遁하던 곳이며, 아들 晩岡 誼가 그 아버지가 세운 方山齊를 고쳐서 敬止亭이라 하였고 후세에 이를 重修하여 晩岡亭이라 하였으니, 恭肅公 沙峰 明德의 후손들이 집단하여 사는 公州李氏 世居地이다.

  • 새동네, 신촌(新村)

    한골 살던 公州李氏가 살림을 나서 서낭댕이 東쪽에 새로 터 잡은 마을이므로 새동네라고 하며, 마을 뒤의 上月里로 통하는 고개에는 성황당이 있고 마을 西쪽에는 약물탕이 있다. 委鳳山에 鄭氏의 묘가 있는데 玉兎望月形局이라는 천하 명당이 이곳에 있다. 앞 산에는 붉게 물든 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장수바위라 한다.
    피식등산에 一善金氏가 葬事를 지내는데 마침 한 중이 “그 묘에는 시체가 뭍혔구나”하며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지나가는 것을 붙잡아서 결박하고 곤장을 치던 곳을 달아 맨 곳이란 뜻으로 “다름바”라고 한다. 이곳에는 최근세에 敬山(李馨鎭) 후배 양성을 하던 華東書堂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 마내동, 만의동(晩義洞), 만촌(晩村)

    40호의 龍宮全氏 집성촌이다. 전성시에는 60호가 넘었으나 농촌인구의 감소는 비단 이곳 뿐 만이 아닐 것이다. 처음 이름은 만의동이다. 등너머 所華里에 속한 들 이름이 「마느실」이니 아마 동리 이름과 연관성이 있을 듯하다. 취락이 형성된 것은 약 150년 전이다. 菊坡(全元發)의 後孫에 두 효자가 있었는데 동생인 全震光의 後裔들로 他姓은 없다. 마을 앞에 길다란 논이 있고 거기에 샘이 있는데 大旱不渴인 이 샘이름이 「천돌네샘」이라고 하며 논이름은 「천돌네샘뱀이」라고 한다. 이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 천돌이가 경작했으리라 짐작된다. 마을 앞에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수령 약 160년을 헤아리며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는데 洞里 守護神 洞神木이다. 지금은 洞祭는 지내지 않는다.
    이 느티나무는 知保面의 保護樹이기도 하다. 이 느티나무 아래 「하지백의 샘」이라고 우물이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화주 박이 샘」이다. 華柱는 솟대의 方言이니 科擧에 及第한 사람을 위하여 붉게 칠한 장대위에 푸른 칠을 한 나무로 만든 龍을 단 것을 박아 놓았던 샘이란 뜻이다.
    獨立志士 全炳豹의 祖父 全洪敎가 문과에 급제하였을 때 이 華柱를 세운 뒤부터 생긴 이름이다. 마을 뒤에 祠堂이 있는데 洪敎 및 炳豹 등 祖孫을 모신 祠堂이다. 또 마을 뒤에는 晩義亭이 있는데 全震光의 아들 學古 全世三이 세운 亭子를 중수한 것이다. 한때 彰東義塾이라고 하여 新敎育과 獨立思想을 鼓吹하다가 일제 탄압으로 없어졌으나 知保普通學校 설립의 促進 역할을 하기도 한 곳이다. 晩村에서 北쪽으로 등을 넘으면 심불들이 있다. 西厓 柳相國의 맏아들 長水察訪 柳?의 묘가 掛燈穴인데 小地名이 심불(심지)이니 무척 재미있는 이름이다.

  • 구티미, 구태미, 구태(九台)

    晩村과 九台는 모두 예전 下月谷里에 속한다. 晩村이 촌락을 형성하기 전에는 九台를 下月谷, 上月을 上月谷이라 하였다. 崔氏와 全氏가 같이 사는 혼성촌이며 上月을 큰마, 九台를 작은마라고 부르며, 晩村을 윗마, 九台구태를 아랫마라고 한다. 구티미, 구태미란 語義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西편으로 乃城川이 흐르는데 예전에는 沙川이라 하였다. 上月, 九台로 이어지는 들이 있는데 이들을 “양천들”이라 한다. 이는 두 샘(兩泉)이 있는 들이란 뜻이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수리가 좋은 편이지만 예전에는 이 샘이 이 들의 중요한 관개수단이며, 지금도 없어서는 안될 샘이기도 하다.
    방입(삿갓 모양으로 된 것인데 喪主가 쓰고 다니던 것)을 洛東江에 빠트리고 이 샘에 가면 찾는다고 한다. 이 샘 가까이 夏至샘이 있는데 겨울에 물이 말랐다가 夏至에 물이 나서 농사에 지장이 없도록 灌漑에 한 몫을 한다. 예부터 윗구태미와 아랫구태미가 있었다. 이곳에는 근처인 馬山 그리고 上月, 知保面의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심기 노래가 있다. 通明農謠와 비슷하다. 윗구태미를 지나 晩村쪽으로 가다가 보면 옥골이 있다. 예전에는 물방아가 있던 곳이라서「물방앗골」이라고도 한다. 이곳에는 古墳群이 있는데 그 모양이 특이하다. 石室墳으로 長方形의 房과 같은 모양의 묘인데 도굴꾼의 소행으로 허물어졌지만 돌로 싼 벽이 남아 있는데 三國時代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옥골 西南쪽의 높은 산은 胎封山이라 한다. 이 산 어디엔가 어느 시대의 어느 王子의 胎가 묻혀 있다고도 하고 胎항아리는 벌써 뫼구(墓冠)가 가져 갔다고도 하나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東南으로 한참 가다 보면 어화, 구태, 만촌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1,500평 가량의 밭이 있다. 이 밭 西편 한 모퉁이에 선돌이 보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경작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밭 주인(지금 주인이 아님)이 제거를 하였더니 작물이 자라지 않으므로 다시 밭 한 구석에 세웠다고 한다. 어화와 나부산골의 경계에 「나팔고개」가 있는데 지금은 有形無形하나 옛날에는 서울로 통하는 大路로써 首領이나 기타 官員이 이곳을 지나갈 때 室內(사또의 부인)가 가마에서 내려서 쉬어 가고, 나졸은 號角 또는 나팔을 불었다고 한다. 범새골에는 예전에 호랑이 새끼가 출몰했다고 한다.

매창리(梅倉里)

본시 龍宮郡 內下面 지역인데 倉洞, 梅浦里, 內浦里를 병합하고 梅字와 倉字로 洞名을 삼았다.

  • 매아촌(梅花村), 매포(梅浦), 갓골

    뒷산이 羅浮山이며 그 아래에 梅花村이 있다. 이 말에는 꽃과 나비를 연상하기 십상이지만 전혀 그와는 다르다. 梅花가 필 무렵에 胡蝶이 있겠는가.
    中國의 唐松大八家 중 한 사람인 柳宗元의 저서에 龍城錄이란 책이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隨나라 趙師雄이 羅浮山 아래 梅花村에서 달 밝은 밤에 夢寐間에 美人을 만났는데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梅花의 요정이었다고 한다. 이곳 어디엔가에 梅花落地란 명당자리가 있다는데 龍宮땅에 梅花落地라는 말과 龍城錄의 梅花村이면 응당 그 뒷산은 羅浮山이 바람직하다 하여 이름 붙여으리라. 壬亂을 전후하여 丁希福이란 선비가 이곳에 자라잡은 뒤로 羅州丁氏의 集姓村이 됐다. 知保面에는 接尾詞 “골”이 붙은 지명은 하도 많다. 梅花村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곳에 있어서 갓바위가 있어서 梅花村을 갓골이라고도 한다.

  • 한여골, 한여라(閑余里)

    옛날에 龍宮縣의 원님이 三絃六角을 앞세우고 넘나 들었다는 나팔고개 밑에 丁氏들이 사는 큰 골짜기에 있고 梅花村 옆에 있는 마을인데 뒷산이 높고 앞이 막혀서 하늘만 보이는 조용한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壬亂 당시에 海州崔氏가 한때 정착하였다가 잿마로 移居했다.

  • 창골, 창동(倉洞)

    鄭山鳳 밑에 자리잡은 옛날에 민창이 있던 마을이다. 300여년 전에 權起南이 개척하여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며, 뒷산 중턱에 50명 가량이 들어 갈 수 있는 동굴이 있어 옛날부터 피난처로 알려져 왔다. 옛날에는 羅浮山 아래 龍曲菴이란 절이 있었으며, 壬亂(1592년)에 三姓이 살다가 權氏는 이곳에 머물러 있고 丁氏는 梅花村으로 옮겨 앉았으며 朱氏는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 내골, 내포(內浦)

    洛東江변 안쪽의 아늑한 南향으로 큰 골에 있는 50家 가량의 公州李氏의 집성촌이다. 高麗末에 甘泉文氏들이 개척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文監司가 개척하였다고 하나 신빙성이 적다. 壬辰亂을 전후해서 公州李氏의 臨陂縣令 畛의 아들 貞孫의 후손들이 이주해서 살았는데 그 후 文氏는 떠나고 없다. 300년 전부터 廣州安氏의 安鼎連과 義城金氏의 孟巖 金英烈의 후손인 金繼賢이 서로 전후해서 이곳에 정착하여 현재는 金氏, 安氏 몇집이 남아있다. 密陽朴氏도 거의 동시에 入鄕하였으나 현재 몇집이 남아있다. 慶州崔氏 咸寧金, 李氏, 鄭氏, 朱氏는 최근에 移居한 사람들이다.

  • 문정자(文亭子)

    내골 앞 洛東江邊의 언덕 위에 널찍한 정자의 주춧돌만 남았으나 여기에 文監司가 亭子를 짓고 살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文亭子에 얽힌 숱한 설화가 있는데 江 저편도 역시 文亭子로 알려졌으며, 거기에는 姜監事라는 이가 역시 亭子를 짓고 文監司와 교분이 좋아서 서로 강을 사이에 두고 배를 타고 넘나들면서 여생을 즐겼다고 한다. 文亭子하면 뱃나들이를 말한다. 知橋가 생기기 전까지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知橋가 생긴 후 부터는 나룻배가 자취를 감추고 文亭子란 이름만 남아있다. 江 건너 편 논 가운데 甘泉文氏 가문의 壬亂中 殉節한 三烈婦碑가 있어 이 일대에 甘泉文氏들이 살았었음을 입증한다.

마산리(馬山里)

본래 龍宮縣 內上面의 지역으로 말산 또는 마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漁化里와 舊邑面의 龍浦里를 병합하여 馬山里라 했다.

  • 말산, 마산, 마산리(馬山里)

    馬山은 현재 60여家가 살고 있으며 朝鮮朝 中期 宣祖 扈聖宣武原從功臣 副司直 密城人 朴擎雲이 壬亂때 피난지를 찾아 다니다가 마침 지금의 乃城川과 洛東江 사이에 있는 山間地에 자리잡아 보니 앞산이 나비와 같이 생겨서 나비는 꽃을 좋아하므로 마을 터를 꽃으로 여겨 花山이라고 稱하여 오다가 그 후 100여년이 지난 후손들이 마을 주위에 산이 말과 같이 생겼다 하여 말은 용맹한 짐승이라 후손이 용맹스럽고 번창하라는 뜻으로 다시 馬山이라 改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당시 마을 入口에는 三台七星의 形으로 된 바위가 마을 南쪽에 한 쌍의 거북과 같은 바위가 있어 馬山 마을을 지키므로 재해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형체가 뚜렸하게 남았으며, 10여대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한 때 마을 입구에는 安東張氏와 李氏가 번창하게 살다가 지금의 龍浦, 外坪, 泉香 등지로 옮겨 갔다 한다.

  • 완담(浣潭)

    지금은 겨우 2家가 살고 있다 東來鄭氏의 선대 묘소가 있으며, 三樹亭 鄭龜齡의 묘소도 여기에 있고 渴馬飮水穴이란다. 이곳은 浣潭鄕社가 있던 곳인데 그 由來는 대략 다음과 같다. 1568년(宣祖 戊辰)에 浦內 三樹亭 근처에다가 창건했었는데 入享한 분은 贈 吏 曹判書 鄭龜齡, 弘文館修撰 鄭雍, 贈左贊成 鄭賜의 三父子를 모셨다. 2년 후인 廟字가 落成이 되고 位版을 移安하였다. 그러나 壬亂(1292년)에 兵으로 廟字가 불타 버렸으므로 1606년(宣祖 39 丙午)에 이곳 浣潭 松溪菴 자리에다가 三位를 奉安하다가 1678년 이곳에 廟字를 重建하고 三位를 移安하였으며. 1685년에는 弘文館 應敎 鄭渙, 領議政 文翼公 鄭光弼을 追享하였고, 1764년에는 參奉 鄭榮後, 進士 鄭榮邦 형제를 追享하여 七賢을 奉安하였다. 1816년에는 강당인 洛浦精舍의 준공을 보아 서원으로써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1868년에 은撤되고 位版은 埋安하였다. 본래는 松溪菴이란 중들이 거처하는 사찰인데 이 중들이 鄭氏의 묘소를 수호하였다고 한다. 1879년에 현재의 위치에 浣西樓를 세우고 松溪菴의 현판을 함께 걸어 놓았다.

  • 어와실, 어화(漁化)

    壬亂을 전후해서 촌락이 형성됐는데 본래는 權氏가 개척했으나 지금은 각성이 사는 혼성촌이 됐다. 윗마와 아랫마가 있었는데 윗마는 지금은 밭이 되었고, 지금 취락을 형성한 곳은 아랫마이다. 앞산이 국사봉인데 이 산에 방울새가 서식하고 흉사가 있을 때마다 마을에 날와 와서 洞民에게 알렸다. 東學 때만 해도 이 방울새 덕을 톡톡히 봤다고 한다. 뒷산에 梅塢 鄭榮後의 묘가 있다. 漁化란 뜻은 아무도 자세히 모른다. 여기서 東南으로 나팔고개가 있는데 대은, 지보로 연결되는 한길(大路)이 있었으며, 양지 바른 이 마을은 천봉답일 망정 생곡이 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 큰골, 동녘골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처음으로 尹成景이 개척하였고, 한 때 韓牛의 사육장으로 각광을 받았었다. 또 倭政 때와 해방 후에 못을 팔려다가 실패한 곳이기도 하다. 양쪽에 높은 산이 있고 그 사이로 깊은 골이 있으므로 이름한 곳이며 2가구가 살고 있는 촌락이다.

  • 용포동(龍浦洞)

    본래는 舊邑面에 속하였던 마을이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知保面 馬山里에 편입된 마을이다. 三龍得水形局이라는 이 마을 뒷산이 龍飛山이니 龍宮縣의 龍飛山 아래 있는 龍浦洞이다.
    예전에는 우리 고장 사람들이 龍宮縣廳 즉 관가에 갈려면 이 龍浦洞 뒷산을 넘어서 龍宮을 다녔는데 산 넘어 洞里가 城底里(성 밑)이고 보면 아마도 이 산이 옛 산성터인가 보다. 그렇다면 高麗 恭愍王 所築으로 된 것이며, 紅巾賊亂에 安東行在所로 가기 전에 이 산성에 머물다가 龍浦洞을 지나 갔을지도 모른다. 聞慶郡 永順面 旺泰里에 恭愍王이 지나 갔다는 王衣山이 있기에 말이다.
    馬山에 살던 安東張氏는 새로운 기지를 잡아서 張復熙(1845∼1912)가 개척하였다고 하니 100년 가량된 듯하다. 수령 100년을 넘는 느티나무는 洞里 형성과 해가 같으며 洞神木으로 마을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馬山에 있던 南塢 張信立의 祠堂을 1965년에 이곳으로 이건하였고, 南塢亭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마을 앞에는 農村電化事業으로 知保面에서 가장 奧地인 이 마을에까지 電氣를 끌어 들인 張錫度의 功德碑가 서 있다. 臥龍堂도 이곳에 있다고 한다. 조대박골은 1870년 이전까지도 李氏들이 살았고, 또 외막실, 빈소골, 중상골, 질매골 등 숱한 설화가 담긴 골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山紫水明한 이 마을은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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